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톈진 조약 (문단 편집) === 배경 === 1882년 6월에 발생한 [[임오군란]]을 계기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중이었고 특히 청은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[* [[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|묄렌도르프]] (외교), [[위안스카이]] (군사), 마젠창 (재정)]을 강화하고 있었다. 1884년 [[청프전쟁]]이 발발하여 조선에 주둔중인 청군 일부가 철수하게 되었고, 이를 기회로 여긴 [[김옥균]], [[박영효]] 등의 급진 개화파 세력이 일본 공사관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재정과 군사 지원 약속을 받고 우정총국[* 조선 말기 우체업무를 담당하던 관청. 처음으로 근대식 우편제도를 도입한 오늘날의 우체국.]의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[[갑신정변]]을 일으켰다. 급진 개화파세력은 당시 친청세력인 민씨 정권 요인(민영목,민태호 등)을 살해하고, 왕과 왕비를 볼모로 삼아 개화당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. 이렇게 갑신정변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듯 싶었으나 명성황후 민씨의 모략으로[* [[찻잔]] 밑에 청군을 요청한다는 밀서를 몰래 써 전달 하였다고 한다.] 청군이 국내에 들어오게 되고, 설상가상으로 지원을 약속한 일본군의 소극적인 대처로 결국 청군이 진압하게 된다. 이후 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들은 죽거나 해외로 망명[* [[홍영식]]은 진압 당시 피살되었고 [[김옥균]]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[[홍종우]]에게 상해에서 피살, [[박영효]], [[서광범]]은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[[서재필]]은 미국으로 망명하였다.]하게 되고 개화당 정부 수립 3일만에 [[갑신정변]]은 막을 내리게 된다. 이후 정변을 진압한 청군의 내정간섭이 더욱 심화되었으며 청과 일본이 1885년 4월 조약을 맺게 되는데, 이것이 바로 톈진 조약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